1장. 빗속의 혈향(血香)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천하제일검문(天下第一劍門)이라 불리며 강호 정파의 태산북두로 군림하던 천검장(天劍莊)의 웅장한 기와지붕 위로 붉은 피가 빗물과 섞여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천검장의 제자 하나가 가슴에 거대한 혈인(血印)이 찍힌 채 고꾸라졌다. 그의 뒤로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자들은 기괴한 귀면(鬼面)을 쓴 혈마교(血魔敎)의 살수들이었다.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교주님의 명이다!”

핏발 선 호통 사이로, 십 대 후반의 소년 진무영(陳無影)은 떨리는 손으로 부러진 철검을 쥐고 있었다. 그는 천검장의 장문인, 진천풍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숙과 사형들이 목숨을 바쳐 만들어준 퇴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것뿐이었다.

“무영아! 살아남거라! 살아남아 반드시 천검의 뜻을 이어야 한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아버지 진천풍의 마지막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무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버지가 뿜어낸 마지막 검강(劍罡)이 무위로 돌아갈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영은 경공(輕功)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단전(丹田)의 진기(眞氣)가 바닥을 드러내며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두 다리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혈마교의 추격대는 끈질겼다. 어느새 무영의 발걸음이 멎은 곳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천혼애(天魂崖)의 끝이었다. 절벽 아래로는 검은 구름과 맹렬한 탁류만이 보일 뿐이었다.

“독안에 든 쥐로구나. 순순히 목을 내놓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귀면을 쓴 살수대장이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무영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혈마교의 개들에게 내어줄 목은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칠흑 같은 천혼애의 낭떠러지 아래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살수들이 황급히 절벽 끝으로 달려왔으나, 소년의 모습은 짙은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2장. 무영(無影)의 기연(奇緣)

절망의 끝에서 눈을 떴을 때, 무영의 온몸은 뼈가 부서지고 내상이 심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가 추락한 곳은 천혼애 밑바닥의 깊은 동굴 안쪽이었다. 며칠을 의식 없이 앓던 그는 절벽 틈새로 떨어지는 이슬과 이끼를 씹어 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영은 동굴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절뚝이며 안으로 들어간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종유석 아래, 백골이 된 노인의 시신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백골의 무릎 위에 놓인 한 자루의 목검(木劍)과, 바닥에 날카로운 기운으로 파여 있는 글귀들이었다.

[검에 형(形)이 있으면 부러질 것이요, 검에 뜻(意)이 얽매이면 흐려질 것이다. 무형(無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하를 벤다. 나 무극검존(無極劍尊), 평생을 바쳐 깨달은 이치를 남기노니, 인연이 닿는 자는 거두어라.]

무극검존! 무영의 숨이 턱 막혔다. 이백 년 전 단기필마로 마교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홀연히 사라진 전설 속의 기인. 그가 남긴 절학이 이 습기 찬 동굴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무영은 백골을 향해 삼고구고(三叩九叩)의 큰절을 올렸다. “제자 진무영, 사조의 뜻을 이어 반드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한을 풀겠나이다.”

그날부터 무영의 지옥 같은 수련이 시작되었다. 동굴 벽에 새겨진 무극검결(無極劍訣)은 기존 천검장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했다. 형체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진기를 맡겨야 했다. 초반에는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위기를 수십 번 겪으며 피를 토했지만, 복수를 향한 그의 집념은 바위보다 단단했다.

봄비가 내리고, 가을 낙엽이 지고, 겨울의 눈보라가 동굴 입구를 막기를 십여 차례.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러진 철검을 쥔 소년은 사라지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한 눈빛을 지닌 청년이 서 있었다.

그가 손에 쥔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두르자, 아무런 파공성(破空聲)도 없이 동굴 벽을 막고 있던 수 톤짜리 바위가 두부 썰리듯 매끄럽게 반으로 갈라졌다. 검기(劍氣)를 넘어선 검강(劍罡), 그리고 그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검(無形劍)의 경지였다.

무영은 옷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때가 되었다.”

3장. 강호 출사(出道)

강호는 지난 십 년간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혈마교는 정파 무림의 팔 할을 장악했고, 강호인들은 마교의 숨소리 하나에도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다.

산동성(山東省)의 한적한 객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객잔 안에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혈마교도 예닐곱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낡은 삿갓을 쓰고 해진 흑의를 입은 청년이 조용히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이보쇼, 밥알이 섞인 고깃국이나 한 그릇 주시오.”

청년의 목소리는 평범했지만, 혈마교도 중 하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딜 감히 개뼈다귀 같은 놈이 우리가 술을 마시는 곳에 기어 들어오느냐! 당장 목을 쳐라!”

칼을 뽑아든 마교도가 청년을 향해 살기를 뿜으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청년, 무영은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 하나를 들어 가볍게 튕겼다.

핑-!

아무도 그 속도를 보지 못했다. 그저 젓가락이 마교도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고 객잔 기둥에 깊숙이 박혔을 뿐이다. 마교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객잔 안이 얼어붙었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무영은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리며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천검의 혼이, 빚을 받으러 왔다고 전해라.”

그날 산동성 객잔에 있던 혈마교도 전원은 단 한 번의 검상도 없이 전멸했다. 무기는 커녕 주먹을 쓴 흔적조차 없었다. 이 기괴한 소문은 ‘무영귀(無影鬼)’라는 이름과 함께 강호 전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4장. 비원(悲願)의 끝

무영의 복수는 거침이 없었다. 혈마교의 분타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고, 마침내 무영은 무당산(武當山)의 옛 터에 세워진 혈마교의 총본산, 혈마궁(血魔宮) 앞에 섰다.

수천 명의 교도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무영의 발걸음은 산보를 나온 듯 여유로웠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교도들의 무기를 박살 내고 그들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마침내 거대한 궁의 문이 부서지며, 혈마교주 백무진(白武眞)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서 붉은 혈기(血氣)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는, 화경(化境)에 이른 절대고수였다.

“애송이 놈이 기연을 얻더니 제 분수도 모르고 찾아왔구나. 네 아비 진천풍처럼 내 손에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주마!”

백무진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펼친 절초, 수라혈천강(修羅血天罡)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무영을 향해 쏟아졌다. 산을 통째로 쪼개버릴 듯한 엄청난 위력이었다. 사방의 기압이 뒤틀리고 흙먼지가 회오리쳤다.

그러나 무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십 년 전, 빗속에서 죽어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천혼애의 뼈 시린 바람이 스쳐 갔다. 그리고 동굴에서 깨달은 한 줄기 자연의 이치가 단전에서부터 검 끝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검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저, 벨 뿐이다.’

무영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손에는 어떤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백무진의 거대한 붉은 검강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소멸했다. 아니, 소멸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져 버렸다.

“크, 크헉…!”

백무진의 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단전까지, 베인 자국조차 없는 일직선의 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엄청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화경의 고수조차 인지하지 못한 완전한 무형(無形)의 검이었다.

“이… 이것이… 무슨…” “천하에 담지 못할 검은 없다. 그것이 무극(無極)이다.”

백무진의 거구는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고, 그를 따르던 수천의 교도들은 악마를 본 듯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5장. 다시 바람 속으로

비가 잦아들고,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피로 물든 무당산의 정상을 비추었다. 무영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수는 끝났으나, 가슴속의 공허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아버지, 사형들… 이제야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그는 부서진 혈마궁의 현판 위에 낡은 철검 조각 하나를 올려두었다. 자신이 천검장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유품이었다.

강호인들은 무영을 구세주라 부르며 새로운 천하제일인으로 추대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무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전설이 된 이름뿐이었다.

어느 깊은 산길, 낡은 삿갓을 쓴 청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바람결에 나뭇잎만 가볍게 흔들릴 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진정한 무영(無影), 그림자 없는 자의 유람이 시작된 것이다.